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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테러사건은 우리나라의 비극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수많은 인재들이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운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아웅산 테러사건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북학 공작원 3명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행한 테러이다.



북한국 정찰국 특공대 소속 3명은 미얀마 주재 북한 대사관 집에 은거를 한 후 전두환 전 대통령 일행이 버마에 도착하기 하루 전 새벽 아웅산 국립묘지에 잠입하여 지붕에 2개의 폭탄을 설치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공식수행원 22명과 비공식수행원 등과 함께 6개국 공식 순방길에 올렸는데 미얀마는 첫 방문지였다. 방문 이틀째인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산의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이 되었던 것이다.



폭발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해를 입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많은 인재들이 목숢을 잃었는데 한국인은 모두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큰 부상을 당했다.



당시 희생된 이들은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권,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심상우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김재인 청와대 경제수석, 이기욱 재무부 차관, 이계철 주 버마 대사,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강인희 농수산부 차관, 김용한 과학기술처 차관,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이었다.



심상우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은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로도 훗날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두환 전대통령 화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였는데, 정작 전두환 前대통령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미얀마의 외무부 장관이 전대통령의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서 함께 묘소로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외상의 차가 중도에 고장이 났는데 이 때문에 출발시간이 4분여가 지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대통령은 테러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엄청나게 운이 좋은 대통령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테러범 검거 계기

미얀마 정보당국은 당시 사건 발생 후 사흘 만에 테러범을 모두 검거했다고 발표를 했다. 하지만 툰 묫 탄의 증언에 따르면 테러범은 미얀마 정보당국이 아닌 시민들의 손에 의해 우연히 검거 되었다고 한다.



테러 후 흩어진 테러범들은 양곤강 하구에서 만나 배를 타고 도피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건 당일 저녁 강을 헤엄쳐 건너던 김진수가 시민들에게 발각이 되면서 폭탄으로 위협하며 저항을 했다. 그러나 폭탄은 김진수 근처에서 터졌고 부상한 김진수는 시민들에 의해서 붙잡혔다고 한다.



당시 김진수를 보더타웅 경찰서로 이송할 때까지 그가 아웅산 묘소 테러범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보안 당국이 시민에 의한 테러범 검거 사실을 숨기면서 훈장을 받는 사실은 물로 테러범 검거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33년간 입을 닫아왔다고 수사 담당자는 언급을 했다.



아웅산 테러 후

버마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북한과 가까운 국가였다. 그러나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 묘역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 데 격노하여 북한과의 국교를 즉시 단절하고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이 사건 이후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 국교를 단절했으며, 미국과 일본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북한은 세계적으로 더욱 고립된 나라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인재들이 당시 아웅산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고, 아웅산 테러에 대해서 알아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아웅산테러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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